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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Salon d'art GALLERY

박이도 초대전

2022.10.07~2022.11.05

박이도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
- Written by Meta-Lord Henry Wotton

작가는 패턴이 있어야 할까? 패턴이 있다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뜻이고, 예측이 가능하면 지루하다. 어쩌면 작가에게 패턴은 굴욕이다. 예를 들어, 마크 로스코를 대표하는 후기 작품들에 우리는 사로잡혀 오열을 하면서 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그냥 캔버스를 사각형으로 나누는 그 패턴이 지루하기도 하다. 로스코의 진짜 팬들은 어쩌면 그의 초기작 <거리 풍경>, <지하철 판타지>, <안티고네>나, 그의 중기 작품군에 속하는 이른바 '원시수프'에 비유되기도 했던 멀티폼 작품이 있어서, 그를 더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마크 로스코 역시 지루한 패턴의 작가일 뿐이지만, 그 완성도 높은 지루함 이전에 사랑스러운 초기작들이 그를 더욱 경외하게 하는 것이다. 완성도로 나아가는 그 시간 자체를 우리가 하나의 긴 예술로서 감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박이도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작가인가? 이번 2022년 10월 전시 바늘구멍(Eye of Needle)은 아직 패턴이 없는 발랄한 천재 작가 박이도의 모습을 즐길 수 있는 전시이다. 먼저 Rich Boy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기대하는 작품이며, 감정가는 최소 9999만원이다. 9999만원에 살 돈은 없어도, 9999만원 이하에는 절대 팔고 싶지 않은 작품이다. 책 Radical Markets은 오랜기간 존경 받아온 법정책학자 에릭 포즈너와 신예 천재 경제학자 글렌 웨일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개조하자는 담대한 주장을 담은 책인데, 그들의 대부분의 주장은 스스로가 가격을 제시하는 극단적(Radical) 시장(Market)모델에 주로 기반하고 있다. 이 주장을 미술계에 응용한다면, 이제 모든 미술 감상자는 어떤 작품을 최대 얼마에 살 의향이 있고, 얼마 이하에는 팔 의향이 없다는 식으로 가격을 제시하면서 작품에 대해 논할 필요가 있다. 이에 입각하여 감정된 리치보이의 현재가는 구천구백구십구만원인 것이다. 어떤 작가의 작품을 호당 가격으로 재단하는 행위는 고매한 학자의 역작을 종이 페이지수로 측정하여 가격을 매기는 현재의 출판 시장의 무지막지함과 크게 다르지 않고, 모든 상영관 영화의 가격이 똑같은 획일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이클 잭슨의 모든 곡이 빌보드차트의 1위를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모든 작가의 작품은 싸이즈 당 가격으로 매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2022년 현재 박이도 작가의 호당 가격이 얼마인가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 리치보이는 9999만원인 것이다. 우리는 Rich Boy라는 기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박이도는 애초에 기표도 경멸하는 듯 하다. 그의 그림에는 제목이 정해져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클래식 음악에서 표제 음악이 촌스러웠던 것처럼, 그래서 그냥 교향곡 5번, 9번, 피협 21번, 27번 하는 것처럼, 그냥 표제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어쨌든 그림을 글로 지칭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우리는 리치보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리치보이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먼저 떠올린다. 핸섬한 젊은이의 초상. 귀족에 부자에 용모와 건강까지 갖춘 완벽한 남자의 초상이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도리안 그레이의 창조자이자 그 자신인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사진에서 찾아야 할 수밖에 없을 것같다. 두번째로 떠오른 이미지는 마이클 잭슨이다. 1995년 앨범 History는 그의 히트곡을 CD1에, 신곡을 CD2에 담으면서, 앨범 자켓에 마이클잭슨의 동상을 그리고 있다. 이는 특수효과 아티스트이자 조각가 다이애나 월차크(Diana Walczak)의 작품을 그녀 스스로가 디지털로 재현한 것으로, 이 작품이 박이도의 리치보이에 영감을 준 것인가 하는 의심을 재미삼아 해본다. 다이애나의 마이클 잭슨 동상은 러시아 볼고그라드에 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영웅들 조각의 하나인 조국의

  • <리치보이>박이도

부름(Motherland Calls)과 비슷한 하얀 대리석 조각을 만들어 달라는 잭슨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리치보이의 신비함은 월차크가 자신의 잭슨 동상 작품을 디지털화한 것과 같이 이 회화가 어떤 동상을 그린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 화면속에 있는 그 리치보이가 사실 동상이 아니라 생물학적 젊은이 그 자체를 그린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은색 동상을 그린 것인가, 아니면 사람 그 자체를 그린 것인가? 감상자는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과 표면을 살핀다. 이 색은 어쩌면 은색 동상앞에 서있는 사람의 색깔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실버에 은근히 도는 핑크 또는 연한 핏빛은 그 앞에 있는 사람의 살빛을 의미하는 것 같은 동시에, 만약 이 피사체가 동상이 아니라 사람 그자체라면, 그 사람의 붉은 마음과 그가 겪은 청록색 사건들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까지 미치게 된다. 그의 얼굴 표정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지금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가? 웃고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를 지긋이 바라보는듯 하지만, 얼굴의 근육은 응시대상없이 그저 자신의 굳은 의지만을 발산하고 있는 느낌이다. 언젠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골드라고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회사의 브랜딩을 도와주다가 발견한 Golden Color. 아 황금색, 황금빛도 색깔이지? 그런데 골든 칼라는 3원색만으로는 표현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더 재밌는 것 같다. 우리가 좋은시절을 황금시대 Golden Era라고 부르고 좋은 규칙을 골든룰 Golden Rule 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황금빛은 좋은 의미가 많다. 황금 분할도 있다. 손흥민 선수가 골든 슈, 골든 부츠 상을 받은 것처럼.. 엄마야 누나야 노래에서도 나온다.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석양에 반짝이는 황금빛 들판, 금모래빛 바닷가를 보면서 황금빛 사랑을 하고 황금빛 추억도 만들고 싶다. 리치 보이는 골든 칼라 뿐만 아니라, 실버, 청동 칼라까지 어우러진 역작이다. 문화적으로 리치했던 오스카 와일드, 리치한 그가 창조했으면서도 그 자신을 표상하는 인물 도리안 그레이, 그리고 정말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리치했던 마이클 잭슨, 그리고 오스카와 마이클 만큼의 천재적 잠재성이 있는 리치보이 박이도 그 자신의 표상이다. 마크 로스코의 초중기 작품에서 우리가 그의 더욱 위대함을 느꼈듯, 박이도의 리치보이는 훗날 그의 초중기작들도 만만치 않았음을 증명할 것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인 바늘구멍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은 인물의 두 눈만을 표현하거나, 허벅지에서 종아리까지만의 가녀린 하체를 다룬작품, 여성의 닙플의 아래부터 배꼽위까지만의 누드, 두눈을 제외하고 코와 입술, 목만을 묘사한 작품, 인중부분과 입술, 턱, 그리고 뺨의 반만을 소재로 한 작품 등 신체의 일부분만을 다양하게 작업한 작품군들이다. 박이도는 인체의 전체를 다 그리는 '패턴', 인체의 특정 부위만 반복적으로 그리는 패턴의 지루함을 거부한다.

우선 인체의 특정 부위를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만 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두 눈에 집중한 작품 <유리 눈물> 연인 키키의 봉긋한 엉덩이의 매력을 드러내면서도 얄밉게도 두손으로 중요한 부분을 가려놓고나서, 익살스런 표제를 가진 <기도하는 사람> 천문대위의 하늘에 거대한 입술을 그려넣은 <천문대의 시간 - 연인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만 레이와는 달리, 박이도는 특정부분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묘사하지 않은 것이다. 누드인데, 유두와 배꼽이 없고, 얼굴인데 뺨은 한쪽이며, 여성의 각선미에서 중요한 Y부분은 생략해서 관람자를 약올린다. 모델은 벗었던 것일까 아닐까? 모델은 누구였을까? 이런 것에 대한 힌트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만 이미 보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모델이 누구인지는 작가 자신만 아는 것이다. 관람자는, 그저 바늘구멍으로 들여다보듯, 작가 박이도가 다 보고, 다 아는, 즉 전지전관(全知全觀)한 작가가 일부 허용한 부분만을 목마르게 감상하고, 이 작품을 소유하더라도 영원히 작가가 보고 알고 있는 것의 일부만을 소유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작가의 배려이다. 콜렉터가 이 작품을 소유하는 순간,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덧붙여 완성할 수 있다. 작가와 콜렉터의 Co-Creation이 이루어진다. 이제 그 작품은 박이도의 창작물인 동시에 컬렉터의 2차 창작물이 된다. 인식을 방해하는 바늘 구멍이 되려 창작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제목 바늘 구멍은 필자의 감상을 방해한다. 1980년대 영화 바늘구멍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영국 북부의 거친 파도를 가진 바닷가 마을에 어느날 남정네가 떠밀려온다. 무능한 남편에 질린 여인은 남정네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히틀러의 스파이. 남자는 무정하게도 여인을 버리고 탈출하려 한다. 오직 스파이로서의 임무에 충실한다. 여인네는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남정네가 아닌 간첩일뿐. 그녀는 애국심인지 분노인지 모를 어떤 힘으로 그를 사살한다. 아직도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바늘 구멍인지 모른다. 남정네는 여인의 모든 것을 보았는데, 여인은 바늘 구멍으로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일까? 박이도 역시 이 전시의 제목이 왜 바늘 구멍인지 얼버무린다. 전시 제목이라는 기표가 전시 작품을 표제하는 그런 패턴이 그는 지루하다. 천재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창조한다.

Written by Meta-Lord Henry Wotton